하정희 조합원을 추모하며

하정희 조합원을 추모하며

2016년 5월 24일 현재 작성중입니다.

1996년인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알고지내던, 하지만 연락은 뜸했던 대구 푸른평화의 정홍규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일본 생협과의 교류과정에서 유기재배 생산자들이 활용하고 있는 기술을 봤는데, 이를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다고.. 하지만 전문적인 기술 부분이 있어 도움을 요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나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하는 일이 더 없는 관계로 한번 해보자고 답을 하고 1주간 일본 농가에 실습을 갔습니다. 그곳이 학슈농장(이곳은 산란계를 키우는 농장인데, 일본 B.M.W 협회 상임이사가 운영하고 곳이었고, 이후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입니다.)이었습니다. 다녀와서 기술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협의 과정에서 통역으로 참가한 사람이 하정희대표였습니다. 하대표는 그때 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는 상황이었는데, 역시 정홍규신부의 요청으로 이 일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때는 좋은 일이니까 한두번 통역의 일로 도와주자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과 일본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데, 그때는 대단한 국제외교를 하는 것 같이 신중한 자리가 계속되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이야 쉽게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깊이 들어갈 수록 서로를 믿어도 될 것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를 찾아내기 위한 신경전이 계속 되었습니다. 일본 협회에서는 한국에서 한번 만들면 모든 기술이 넘어간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고, 단체도 아닌 개인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기술이전에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철학적 배경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무척 신경을 쓴 것 같습니다. 특히, 상대의 진정성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들이 오간 것은 실무회의를 마치고 난 저녁식사자리와 술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50대 사회활동 경험이 매우 풍부한 일본 협회 간부들과 20대 후반의 박사과정과 20대 중반의 한국통역이 서로 다른 문화를 기반으로 상대방을 알기 위해 무척 많은 질문과 답이 오고간것 같습니다. 하정희 대표에게는 식사 자리와 술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들까지 정리하고 이를 다시 복기해서 설명해주는 역할까지 주어졌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푸른평화로 부터 비행기 경비 등 실비만 제공되고 인건비는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1997년 경주 남산 아래 한우 농가에 1호 B.M.W 시설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때 통역은 박완선생님이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정희대표는 통역을 그만두고 다른 통역이 참가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푸른평화, 일본BM협회와 저를 포함한 체계화되지 않은 관계 그리고 어른들 무리속에서 가장 나이 어린 여성의 상황에서 두 나라의 생각을 모두 알게 되는 통역자 입장에서 본인의 자리를 매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많은 역할이 부여되면서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하고, 어느 누구도 그것에 맞는 위치를 규정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일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설물에 대한 설계나 시설을 위한 대체 물품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과정과 설치과정에서 대략 파악되었지만, 시설을 가동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식질에 대한 부분이 가장 민감한 사항이었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대체할 수 없어,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이 권한과 책임 그리고 수입의 조건과 특허에 대한 경비 등 매우 민감한 내용을 일본측과 계속 협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통역이 바뀌면서 민감한 그리고 문화를 기반한 상호 진심의 전달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산으로 하정희대표를 찾아간 기억이 납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통역 역할을 다시 하는 것에 대한 하정희 대표의 생각을 물었던(아마, 강요를 하는) 기억이 납니다. 설득을 하는 입장인 나의 기억에는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도입의 필요성만 강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정희대표가 이 일에 대한 의미와 내용에 전적으로 찬동하고, 경제적인 이익(대기업 일본어 강사)를 포기하더라도 상황만 된다면 계속 하고 싶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속으로 어린 나이에 농업, 생태, 순환 등의 어려운 이야기를 잘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특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어려운 이야기보다 기술을 가지고 와서 농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일차원적 생각이 더 많았습니다. 또, 하정희대표가 힘들어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 방법보다는 참고 넘어가야 한다는 강요를 했을 거라고 지금 생각이 듭니다.) 하정희 대표가 다시 통역으로 참가하면서 다시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두번째 설치장소가 풀무학교(계사)였습니다. 풀무학교 B.M.W 2호를(99년 설치, 지금은 사라짐.) 설치하면서 홍순명, 박완, 주형로 등 홍동의 유기농업 농민들이 경주시설도 견학하고 일본 전국의 설치와 활용 사례를 견학다닌 기억이 납니다. (제가 풀무학교 전공부 설립을 함께 하자고 제안 받은 것도 이 일본 여행 중의 기차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지도교수인 박완선생님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대학교수하고 싶냐? 풀무학교에서 일하고 싶냐?”제 대답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보니 대학교수는 정말 재미없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풀무학교에서 일하는게 나을 듯 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홍순명 선생님이 여러 차례 제안을 하셨지만 웃으면서 지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3호는 홍동의 이영남씨댁 돈사(99년 설치, 지금은 사라짐.)였습니다. 이는 홍성 정농회에서 추진한 사업이었습니다. 정농회에서 추진했지만 홍순명 선생님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억됩니다.
99년부터 저는 홍동에 주로 와 있는 상황이었고, 2000년부터는 상주하는 상황에서 푸른평화, 일본과의 교류 그리고 국내 설치에 대한 진행은 대부분 푸른평화와 하정희 대표가 맡아서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양평군 농업기술센터에 시설을 설치하는 과정은 큰 분기점이었습니다. 행정기관과 일을 진행하면서 공식적인 법인형태를 가져야 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공식적인 관계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3차례의 설치과정에서 일본에서 설계를 담당하던 역할을 한국으로 이전해야 할 필요성까지 나타나면서 일본과의 관계도 재설정되면서 한국의 담당자로 (주)소라인터내셔널코리아가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협의를 하고 설계를 진행하는 시기에는 저도 참가를 함께 하였지만, 본 시설공사부터는 전적으로 하정희 대표가 모든 사업의 책임을 담당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풀무학교 전공부의 설립과 운영에 참가하면서 이 일의 실무에서는 완전히 빠지게 되었습니다. 단지, 기술교류회에 참석하거나 학교의 B.M.W 시설에 대한 협의, 한국비엠기술협회 이사, 초창기부터 교류하던 일본 협회 사람들과의 교류회에 얼굴을 비추는 정도로만 활동하였습니다.
양평군의 다양한 활동으로 비엠기술의 적용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10년 뒤에 다시 홍성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홍동농협 퇴비장에 비엠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간 시기에 풀무학교는 끊임 없이 비엠 기술에 대한 적용을 하였습니다. 풀무학교 고등부 신축 기숙사 폐수 처리, 연못 정화 처리, 풀무학교 전공부 식당 폐수 처리 시설, 홍순명 선생님 신축 주택의 폐수 처리 등 다양한 상황에서 적용해 보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주형로 회장 등의 노력으로 충남의 여러 곳에서 비엠시설이 설치되고 그 효과가 농민의 입을 통해 전파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혁신적인 농업기술이라고 하면서 설명하기 위해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대답부터 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현재의 농업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조건에서 그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자본을 투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과 특히, 유기농업에 있어서 그 기술의 효과가 눈에 띌 정도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비료나 농약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합니다. 그만큼 농업분야에서 기술의 확산은 어렵다는 것입니다.비엠 기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평군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한국에서 비엠의 확산이 활성화된 측면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비엠기술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하정희 대표의 노력이 9할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초기 5-6년은 그 기술을 이해시키고 의미와 활용도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은 참으로 대단한 인내력과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 과정에 또 얼마나 많은 농민들과 농업단체들을 데리고 일본을 견학다녔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통역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지 제가 도와준 기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대표는 모르겠지만, 저는 학교 일로 그 역할을 할 수는 없고, 그 역할을 맡기기 위해 비엠기술에 관심을 보인 여러 명을 일본에도 보내고 일이 같이 하고 했습니다만, 모두 엄두를 못내고 물러서는 상황에서 20대의 여린 여성이 그 무거운 짐을 둘러 매겠다고 앞장 선 것입니다.

또한, 그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에 따라 그 기술 적용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기술의 상업적인 측면, 우리 농업과 농민을 위하는 측면, 환경을 배려하는 측면의 비중을 결정하는 것은 담당자의 생각과 활동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비엠 기술 적용이 일본보다 더 활성화된 이유는 단지, 기술의 이용성, 활용성이 더 높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술을 상업적인 측면이 아니라 농촌 환경과 농민을 위한 측면을 더 강조하고 더 높은 비중을 둔 하정희대표의 철학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활동의 모습이 농민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었고 그것은 단지 기술의 효과, 생산물의 증가와 같은 경제적인 요인보다 그 기술을 통한 자연과의 공존, 순환 체계라는 비엠기술의 고유성을 지켜갈 수 있었던 강한 이유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하대표의 생각은 한일농민교류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들어납니다. 일본비엠기술협회와의 교류 속에서 이들과 연결되는 일본 유기농업 관련된 생협을 포함한 여러 단체들과도 교류가 확대되면서 교류의 중심에 서 있던 하대표의 역할이 더 많아졌습니다. 생협 소비자간의 교류와 일본 유기농업, 생협 담당자들의 한국 방문, 논생물다양성 조사를 위한 한일교류회, 논생물다양성 농법 기술회의 등 한일 농업, 농민 교류에서 일정조정, 통역, 발표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비엠기술협회

농업에 대한 관심, 생태에 대한 관심

하정희 대표는 아마 처음 시작을 할때 제가 참석했다는 것에 시간이 지날 수록 예의를 갖추었던 같습니다. 2010년 이후 주형로 대표의 노력으로 홍성에서 다시 비엠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여러 곳을

농업을 하는 어른들 틈바구니 속에서…

더군다나 처음부터 비엠기술을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농업의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목표를 위해, 그리고
저는 하정희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것을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설명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제가 설명하려고 하면 괜찮다고 하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기 때문에 돈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심은 그 노력의 빛을 감퇴시킬… 비엠협회

일본 통역, 비엠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저는 이러한 글을 하정희 대표가 저에 대해서 작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정희 대표에 대해 글을 적는 가슴 아픈 상황이 벌여졌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장을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 함께 다니던, 소식을 전해 들은 지역 사람들이 이렇게 침통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단지,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하정희 대표에게는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부채는 단지,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의지하고 언제나 도움을 스스럼 없이 요청할 수 있는 자신도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의미있는 일에는 조금이라도 도와주기 위해 분투하던 동료가, 미처 도움을 갚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부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만날 때마다 서로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밝게 마무리하던 한참 어린 사람의 모습을 보여서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었던… 특히, 홍성 지역의 많은 문제를 논의할 때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함께 걱정해주던 큰 동지가 사라진 허전함은 한참 갈 듯 합니다. 간혹 하던 술주정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우리의 허전함이 가족들의 슬픔과는 비교될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그녀의 노력한 결과가 나오려는 시기에 멀리 가버린, 시간이 지나면서 농촌에서 활동한 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 지워질 것이 안타까워 이 글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