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농업, 사회적 농업을 위하여…정재근/장성 풀향기딸기미술관농원

함께 사는 농업, 사회적 농업을 위하여…정재근/장성 풀향기딸기미술관농원

Social Farming이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알아보려고 검색했습니다. 몇 가지 정리된 자료는 Social farming을 care farming, 치유농업으로만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사회적농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농가에 대한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몇몇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지만…그리고 개인농장이 아니라 협동조합 농장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좋은 활동인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http://blog.daum.net/ejrtns08?bz=blog)

원문 : 함께 사는 농업, 사회적 농업을 위하여-정재근/장성 풀향기딸기미술관농원
WBC복지뉴스

“뭐라도 하나 해봐. 나가서 시정(마을회관)이라도 쓸어 보랑께.”
내 영농 생활을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어떻게 이 한마디를 잊을 수 있을까. 목이 콱 막혀 침조차 삼키기 힘들게 느껴질 정도로 나에겐 의미가 깊다.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하고 있던 사업이 크게 파산하고, 몇 년을 경제사범으로 복역하고 나온 나에게 남은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해골 같은 얼굴로 밤낮을 일하는 아내와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 그리고 아빠 얼굴조차 낯설게 여기는 세 딸이 나를 잡고 있는 동아줄이었다. 도망치듯 고향에 내려와 농사라도 지어 먹고 살고자 했으나, 가진 게 없던 나는 무엇을 하든 힘들고 괴로운 나날들뿐이었다. 내 발 뻗을 작은 땅 조차 없어서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고개를 슥 돌리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발품을 팔아도 아무것도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자, 나는 점점 못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서 도대체 무엇을 할까,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농사일을 한다고 해서, 자식들 키워가며 늙어가는 몸을 돌볼 수 있을까. 결국 생활의 의지도, 삶의 희망도 잃어버린 채 나는 허름한 낡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몇날며칠이고 죽을 생각을 했다. 급기야 신나(시너 Thinner)를 온 몸에 뿌리고 살균제를 마셔 자살 기도까지 벌였다.

그 때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당시 마을에서 유일하게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던 동네 형님이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쌀이며, 잡곡이며 가져다 주셨던 형님은 자살 기도로 병원에 실려가 누워있던 나에게 “그렇게 해서 죽는당가? 죽을라믄 제초제를 마셔야지, 살균제 먹고 죽것다는 사람이 어디있으. 사람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진디야? 남 탓 하지말고, 나가서 동네 길가라도 시원허게 쓸어 봐. 사람이 어찌 그리 어리석어?”라고 말하며 두 손을 꼭 잡아 주셨다.
그 날, 얼마나 울었던지. 나만 기다려온 가족들을 볼 낯도 없고, 내 스스로도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후, 그 때부터 나는 집에 있던 빗자루를 들고 나가 동네 어귀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태풍과 폭설이 내리는 날에도 꼬박 꼬박 나가,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청소를 한 기간이 3년. 새벽에는 마을 청소, 오후에는 각종 농업 교육을 받으며 3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자 나는 어엿한 그 동네의 일원, 한 명의 농업인이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땅을 임대하고 정부의 지원도 받아, 딸기 농장인 ‘풀향기 미술관 농원’을 꾸렸다. 내가 지금까지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사회적 농업’의 미약한 시작이었다. 귀농하기 전, 화랑을 운영하며 미술 공부를 했던 나는 그 때의 경험을 살려 단순히 농장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소비자가 방문하여 농장을 둘러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지인들이 자유롭게 들려 농업에 대한 이야기, 농촌의 생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농장 옆에 마련한 비닐하우스를 생활공간이자 판매처로 삼고, 여러 그림과 조각을 배치하고 화단을 가꾸어 작은 미술관처럼 꾸미려고 애를 쓴 것이다. 또한 농장을 운영하면서 전남대학교 농업CEO 과정, 농촌진흥청의 강소농(强小農) 과정 및 교육 농장 과정, 장성미래농업대학 교육 과정 등을 수료하여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농업이 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물색했다. 매일 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4번의 농장 순찰을 돌면서 ‘정직한 농민이 되자. 보여주기 위한 농업이 아닌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는 농업을 이루자. 농업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회를 찾아보자.’고 늘 다짐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사회적 농업’이었다. 내가 꿈꾸는 사회적 농업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고객) 중심의 농업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비자와 함께 공감하고 공유하며 소통을 통해 소비자도 농촌 생활을 느껴보게끔 하고, 사회적인 공헌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농민과 소비자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소망했다. 귀농하기 전까지 나 역시 다른 도시 사람들처럼 농촌과 농업을 촌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막상 내가 농사꾼이 되어 일을 해보니, 농사일은 정말 정직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밤낮이나 계절에 상관없이 땅을 가꾸고 씨앗을 뿌리는 등 부지런을 떨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시에, 참 안타깝게도 농민이 투자하는 비용이나 노력만큼의 금전적인 부를 바라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농촌과 농업, 농민이 함께 잘 살고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은 농민이 먼저 나서서 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마음 맞는 농민들을 모아 들녘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처음엔 욕도, 시행착오도 참 많이 겪었다. 사회적 농업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협동조합을 운영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말만 번지르르한 농업 사기꾼(?)이 나타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자발적으로 나서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가 구상한 것들을 실행시켜나갈 자신이 있었다. 우선 조합원들이 농작물직판으로 판매한 금액의 7%를 적립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적립금은 사회 환원 차원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직판 주문을 하는 소비자에게는 판매대금의 일부를 적립하고 있다는 것과 그 금액이 장학금으로 쓰일 예정이라는 사실을 매번 알려주었다. 소비자와의 직판 거래가 늘어나면서 좋은 일 한다는 칭찬과 함께 소소한 모금액을 건네는 고객이 점차 생기고, 우리 조합의 취지가 널리 알려지며 한 명의 소비자가 다수의 소비자를 끌고 오는 고마운 현상도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조합원들의 매출이 늘어나고, 적립금도 꾸준히 쌓여갔다. 연말이 되면서 우리 조합은 그 동안 모아온 적립금을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과 청소년에게 나누어 장학금 형태로 전달하였고, 소비자에겐 개개인마다 적립금의 사용내역과 거래 내역을 정산하여 고객들이 간접적으로 기부를 하였다는 것을 전자 메일이나 우편을 통해 알렸다. 사회적 농업을 위한 첫 번째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조합과 소비자 간의 확장된 네트워크를 통해 소비자는 농촌 사회에 이바지 했다는 자부심과 건강하고 신선한 먹을거리를 제공받고,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피땀 흘려 재배한 농작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금전적인 성공을 얻게 되는 상생의 기쁨이 가득한 달콤한 성공이었다.

들녘영농조합이 안정궤도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시작한 일은 재능기부와 멘토링 활동이었다. 주변 지인들과 조합원들은 나의 미술 재능을 살려 장성군 지역 장애인을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때마침 풀향기 미술관 농원에 찾아온 장성군 사회복지관의 선생님 역시 농장을 둘러보다 아이들을 가르쳐주시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터라 큰 고민 없이 바로 컨테이너를 들여, 장애인들을 위한 미술 교실을 만들었다. 매주 1회씩 장성군 사회복지관의 장애인들이 오면 나는 하던 농사일도 다 놓아두고 성심성의껏 색깔 배치부터 도형, 선 그리기 등 장애인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딸기 농장을 구경하며 그네들처럼 예쁘고 반짝반짝 빛나는 딸기들을 닮은 꿈을 키워나갔다. 동시에 내 꿈도 점차 부풀어, 아이들에게 미술 교육 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농사일을 체험해보고 그 결실을 통해 경제적으로 자립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성군 복지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2년째 되던 해에 나는 아내와 상의하여, 복지관 아이들이 스스로 관리부터 생산, 판매까지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딸기 토경 밭에 있는 비닐하우스 한 동을 장성군 장애인 자립 딸기농장으로 통째로 제공 했다. 복지관 아이들이 오지 않을 때는 나와 아내가 하우스를 관리하고, 아이들이 오는 날에는 나와 아내가 직접 딸기 모종 심는 법, 딸기 따는 법 등을 가르쳐주며 함께 농사를 지었다.
수확 철이 되면서 아이들은 복지관 선생님들과 다른 친구들을 초대하여 딸기를 수확하고, 직접 포장하여 장성군 사회 복지관 앞에서 딸기를 파는 등의 경험을 했다. 이 작은 장애인 자활농장은 아이들이 텃밭을 일구는 재미와 직접 몸으로 일하는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직접 결실을 맺어 경제적인 자립까지 경험해 볼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체험의 장이 되었다. 자활 농장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자, 직접 장애인 자활 농장을 둘러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방문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농장 체험 활동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현재 그것과 관련된 문의가 많이 오고 있다.
아이들의 미술 수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사회적 농업에 대한 꿈을 실현해 나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쁘다. 현재는 미술 선생님으로서의 내 명성이 제법 알려졌는지, 광주시의 양로원 한 곳과 장성군과 광산구의 정신보건센터 두 곳에서 주 1회씩 미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농업을 통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멘토링 활동은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귀농 선배로서 지혜를 나눠주고, 농장 실습 프로그램과 현장 방문을 통한 농촌 체험 등을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영농 생활을 돌이켜 보면, 힘든 도시 생활을 접고 도망치듯이 내려온 농촌에서 정착하기까지 참 많은 어려움과 고비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절망에 빠진 나를 일으켜 세운 가족과 든든한 선배 농업인들의 덕분이었다.
농작물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는 아주 귀중한 말을 해준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촌놈에게 딸기 재배 방법을 알려준 것도 다 그 고비를 지나온 농촌 선배들의 진심어린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농조합을 운영하고, 농장을 꾸려나가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것은 무작정 아무런 지식 없이 절박함 하나로 시골에 내려왔다가 귀농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귀농 프로그램이 국가적으로 운영되고, 또 지방자치단체 마다 귀농을 장려하기 위해 큰 관심을 쏟고 있기는 하지만, 농업이 워낙 고되고 힘든 일이기도 하고 아무런 연고 없이 시골에 와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귀농인들에겐 큰 어려움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의 내가 정말 삶에 대한 절박함 하나로 버티고 귀농을 결심했듯이, 정말 절실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내가 쌓아온 수많은 이야기와 경험들을 전달해준다면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운영한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하여 농업의 어려움 및 건강한 토종 농산품에 대한 관심이나 귀농할 때 주의하고 고려해야할 점 등에 관한 내용들을 올리며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천안에 있는 연암 대학교의 농업 관련 학과 교수님 및 학생들과 인연이 닿아 학생들이 우리 농장으로 농장실습과 교육을 받으러 오거나, 실제로 귀농을 꿈꾸는 30~40대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연락을 하여 농장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근에는 장성군과 협력하여 들녘영농조합 차원에서 귀농에 대한 문의를 하거나 농장 실습을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리 농장을 방문하여 실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조합의 귀농 실습 프로그램을 통해, 장성군에 귀농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어 지역 발전이나 개인의 삶을 위해 여러 활동들을 하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농업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것이다. 다만 농업인은 쇠락해가는 국내의 농촌 시장과 더딘 발전으로 인해 심각한 불균형을 낳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모두 고려해야하는 사회적인 책임과 걱정까지 껴안아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농민이 변하지 않으면, 소비자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로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 나서서 새로운 통로를 찾고, 소비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나의 농산품들이 인정받아야만 내가 살고 더 나아가 농촌이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혹자들은 내가 농사꾼인지, 미술 선생인지 모르겠다고 비웃기도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농민으로서 내가 늘 무언가를 시도하고, 뭐 하나라도 더 해보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사회적 농업을 내세운 것도, 물건을 더 팔아보려는 심보가 아니라 농촌에 활력이 생기고 나와 더불어 모든 농민들이 노력하고 고생한 것만큼의 보상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또한 나 역시도 소비자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믿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농산품을 선택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우리 농산품을 홍보하고,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농민으로서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 천재지변까지 모두 이겨내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는 더운 곳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빗물이 속옷을 적시는 곳에서 일하는 숙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농작물을 생산하고 팔아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그 숙명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생각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고안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선 농업도 변화해야 한다. 사회적 농업을 위하여, 다 같이 사는 세상을 위하여. 그것 하나만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